국제법은 유럽에서 기원했다.
유럽에서 기원한 국제법이 어떻게 아시아까지 전해졌을까.

먼저 유럽에서 국제법이 어떤 식으로 발전했는지부터 살펴보겠다.
17세기 30년 전쟁을 종결지은 베스트팔렌조약(웨스트팔리아 조약)은 곧 주권국가의 평등을 바탕으로 한 국제질서의 탄생을 의미한다.
19세기 국제법은 조약이나 관습국제법처럼 국가들이 명시적 혹은 묵시적으로 동의한 것만 국제법으로 인정한다는 법실증주의가 중심을 이룬다.
법실증주의와 반대에 있는 자연법은, 국제법이 국가의 동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는 입장인데, 법에는 보편적인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가량 인도에 반한 죄, 노예제 금지, 제노사이드 금지 등이 있겠다.
이러한 법실증주의 중심의 국제법은 국가의 의지를 중요시한다. 국제법이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쟁탈하는 것을 합리화해주는 도구로서 사용되며, 유럽의 팽창과 함께, 제국주의 국제법을 형성하였다.
가령 유럽국가들은 국제법이 없던 국가들을 비문명국으로 간주하고, 국제법의 보호 대상도, 주권을 가진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였다.
또한 어떠한 땅에 대해 실제로 군대, 행정기관, 경찰 등이 지배해야만 소유권이 인정된다는 식의 원칙을 내세우며 영토를 점유할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후 국제연맹이 생기고, 전쟁 제한가 이루어진다. 국제법 법전화와 국가중심주의적 경향을 탈피하려는 노력도 이루어진다.
하지만 국제연맹의 허점과 대공황 등 제2차세계대전이 다시 발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UN이 탄생하고 국제사회에는 다양성이 증대된다.
1945년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에서 무력행사 금지를 명문화하게 된다.
“모든 국가는 국제 관계에서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사용을 삼가야 한다.”
그리고 자연법적 사상이 국제법에서 부분적으로 부활하게 된다. 인도적 국제법이 강화되고(1949 제네바 협약, 1977 추가의정서), 1945~1946년 국제형사법이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 처벌에 쓰였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인간에게 타고난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게 된다.
이외에도 어떤 조약을 맺더라도 절대 어길 수 없는 규범이 존재한다는 강행규범(Jus Cogens, [유스 코겐스 혹은 영어식으로 쥬스코겐즈]) 개념이 다시 강조된다.
그리고 국가들이 단순히 각자 생존만 추구하던 것을 벗어나 공통의 가치와 규범을 지키기 위해 협력하게 되는 시기가 도래해, 국제공동체의 개념이 강화된다. 대표적으로 UN이나 세계보건기구 등이 있다.
서양의 국제법 체제가 아시아에 오기 전 아시아에서는 소국은 대국을 섬기고 대국은 소국을 보호한다는 개념에 기초한 긴 세월의 전통적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지배적이었다.
이는 수평적이 아닌 수직적인 질서였다.
중국(당시 청)은 아편 전쟁을 겪으며 서양 세력과 전쟁과 조약 체결을 겪으며 해당 질서를 유지할 힘을 잃고, 국제법 질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편 일본(당시 일본국)은 1609년부터 류큐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1871년에 당시 대만섬 지역 사람들과 마찰이 있었고, 근대화를 빠르게 이룬 일본은 1872년 9월 류큐번을 설치하는 일도 있었다.
사실 위 에피소드도 에피소드지만, 일본은 아시아 3국 중 큰 타격 없이 근대 국제법 질서를 수용한다. 이전부터 교류하던 네덜란드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와 유연한 대처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의 경우 1876년 조일수호조규 aka강화도 조약을 통해 나라를 개방하게 된다.
일본이 조일수호조규에 조선을 자주국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조선을 중화질서에서 공식적으로 이탈하게 하려던 것이었다.
물론 자주국이 되는 건 긍정적으로 보이나, 일본은 조선을 발판 삼고 싶어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즉 당시 일본의 당시 의도는 단순한 우호관계나 평등 외교보다는 청나라의 간섭없는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가까웠다. 이는 당시 일본 사절단 이와쿠라 도모미의 보고서와 일본 외무성의 내부 문서에 명확히 나와있다.
조선은 이 조약을 이후로 줄줄이 소세지 마냥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와 근대적 조약을 맺게 된다.
당시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항해조약(1882) 제1조는 미국은 조선의 독립, 주권, 영토 보전을 존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허나 미국은 조선을 직접 침탈하려는 의도가 컸다기 보다는 경제적, 외교적 영향력 확대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은 문호개방 정책을 통해 아시아 시장을 개방하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셰키 조약 제1조에서 조선의 지위를 완전 무결한 자주독립국가로 명시하고, 청과의 조공과 전례를 폐지시켜버린다. 조선은 강제적으로 자주국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병합정책의 희생물로 전락한다.
조선이 다른 나라에 빼앗긴 건 안타까운 역사다.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조선은 정치경제적 구조가 좋지 않았다.
한글은 살아남았고,
문화와 정신은 지켜졌고,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은 이어졌고,
우리는 새로운 도약을 위한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웠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배하며 주권을 회복하지만, 3년의 미군정기, 한국전쟁을 겪고 분단된다.
오늘날 미중 갈등에서 한반도는 중요한 전략적 무대 중 하나이다.
주한미군 및 한미동맹의 전략적 강화는 이어지고 있으며, 중국은 북한 정권의 안정 유지를 중시하고,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고 있다.
또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중국의 일대일로 전략도 충돌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외교적 전략과 국제법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GLOBAL ORDER RESEARCHES > INTERNATIONAL LAW'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제법의 아버지 그로티우스는 왜 비판받는가 (0) | 2025.06.01 |
---|---|
국제조약에 체결 당시 붙인 ‘허용 불가능한 조건’, 그 결과는? (0) | 2025.05.23 |
외국에서 처벌받은 사람, 한국 법원도 처벌할 수 있을까? 국제법 쟁점 분석 (1) | 2025.05.22 |
외교적 사기? 조건부로 국가 인정했는데, 상대국이 약속을 깼다 (0) | 2025.05.21 |
스위스, UN 경제제재 참여는 ‘영세중립국’ 지위에 위배될까? (0) | 2025.05.20 |